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과의 첨단 무기 경쟁에서 패배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미국은 독일에 뒤처진 첨단 무기 기술을 앞당기기 위해 최고 과학자들을 모아 국방과학과 관련한 연구개발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입니다.
미국 최고 과학자들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레이더를 발견하고 핵무기를 만들어 첨단 무기 부문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도 이 조직은 이름을 바꿔가며 유지되었습니다. 현재는 달파(DARPA, Defens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고등 연구 계획국)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주항공 분야는 나사(NASA)로 분리되었지만, 달파는 방위산업 연구개발을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미국은 한 해 국방비로 7천억 달러 이상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 중 약 8%인 600억 달러 정도를 달파가 사용합니다. 민간기업, 특히 전문경영인이 주도하는 기업은 빠른 시간 내에 수익이 발생하지 않으면 투자를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장기 연구과제는 지출은 내 임기 중에 나가지만, 성과는 차기나 차차기 사장이 챙기는 것이라 매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랜 기간 연구개발이 필요해 당장의 수익이 발생되지 않더라도 꼭 필요한 미래 선도기술에 달파 프로그램의 예산이 배정됩니다.
달파에서는 최초의 인터넷, 인공지능, 스텔스기, 야간 투시경, 레이저 유도폭탄, 마우스, 전자레인지, GPS, 탄소섬유, 수술로봇, 무인 드론 및 감시센서 등이 탄생했습니다. 달파의 모토는 "되든 안 되든 무조건 우리가 최초로 하고 보자! 달파가 건드린 사업이 3년 내에 실용화된다면 그것은 실패한 사업이다! 달파는 절대로 구현 불가능할 것 같은 기술에 손을 대야 한다!"입니다. 이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고 많은 돈과 시간이 들어가더라도 성공할 경우 기존 군사력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연구나 기술에 예산을 투입하겠다는 것입니다.
달파의 목적 자체가 경쟁 국가의 군사 관련 기술적 기습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즉, "저 나라는 어떻게 저런 기상천외한 기술을 개발했지?"라는 소리가 미군에게서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기상천외한 각종 프로젝트를 선정하고 연구기관들을 지원하는 것입니다. 목적은 방위산업이지만, 적진에 투입될 장갑차나 탱크의 무인화 기술을 위해 현상금을 걸고 자율주행차 경주대회를 시작한 달라 그랜드 챌린지(DARPA Grand Challenge)에서 구글 웨이모를 비롯한 자율주행차의 도전이 시작되었고, 현재는 환경이 열악한 비포장도로에서 운행이 가능한 오프로드 자율주행차 연구에 자금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일본 원전이 쓰나미에 파괴되었을 때 원자력 시설에 투입할 만큼 극한 상황에 버티는 로봇이 없다는 이유로 달파 로보틱스 챌린지가 진행되기도 했습니다. 전 세계 연구기관과 대학, 기업이 참가해 보행식 구조로봇 성능을 겨루는 대회였는데, 선발된 17개 팀에 각 20억 원을 기본 제공하고, 본선에 나가는 6개 팀에 13억 원을 더 주며, 우승하면 22억 원을 주는 등 상금이 엄청난 대회였습니다.
달파 로보틱스 챌린저는 통신이 안 되는 상황에서 로봇의 AI가 상황을 자체적으로 분석해서 다음 8개의 미션을 38분 안에 통과해야 하는 대회였습니다. 미션 1: 차량을 타고 로봇이 직접 운전하여, 미션 2: 장애물(거친 땅)을 보고 판단하여 넘어가고, 미션 3: 각목 더미를 보고 판단하여 치우고, 미션 4: 미는 문과 당기는 문, 자동으로 닫히는 문을 열어야 하며, 미션 5: 5계단으로 이루어진 사다리를 올라가고, 미션 6: 근처에 있는 장비를 직접 찾아서 벽을 뚫고, 미션 7: 직접 소방 호스를 연결한 후, 미션 8: 시계 방향과 반시계 방향으로 돌리는 밸브를 잠그는 것입니다.
통신이 불가능한 재난 상황에서 원전을 고치는 임무를 수행하는 로봇을 개발하는 게 이번 대회의 목적이었으며, 일본은 4개 팀이 참여했으나 3개 업체는 넘어지거나 문을 못 열어 탈락하고 1개 업체가 10위에 오른 정도였습니다. 2위와 3위는 미국 팀이 차지했고, 1위는 한국 KAIST의 DRC 휴보가 차지했습니다. 2000년, 일본 혼다가 매년 150억 원을 투입해 아시모를 개발하자, 이에 자극받은 KAIST에서 매년 2억 원의 국비지원을 받아 2004년 12월에 KHR-3 휴보가 만들어졌습니다. 이후 계속된 개선 작업을 거쳐 2015년 달파 챌린지에서 우승한 DRC 휴보가 나온 것입니다.
2015년 휴보 팀은 상금을 종잣돈으로 하고 투자를 유치해 만든 코스닥 기업이 레인보우로보틱스입니다. 달파의 목표는 민간 분야와 다른 나라의 무기 시스템보다 20년 앞서 고민하고 선투자를 하는 것입니다. 현재는 우주 방위 사령부를 만들어 우주 전쟁에 대비한 블랙잭 프로젝트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달파는 관료가 아닌 민간에서 선발된 달파 프로젝트 담당자 120명이 매년 30억 달러의 집행 권한을 가지고 새로운 과제에 예산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달파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달파로부터 분리된 NASA도 많은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슈퍼컴퓨터, 클라우드 컴퓨터, 로봇, 정수기술, 연료전지, 태양광 발전, 풍력 발전, 위성통신, 형상기억합금, 센서, 레이더, 인공장기 등 현재 민간에서 활용되는 많은 기술이 나사 연구에서 파생된 기술입니다.
나사의 연구인력들이 우주선과 우주용품을 만들다가 고안한 최신 기술 중 일상에 적용 가능한 기술이 있으면 이것을 민간에 넘겨주는 나사 기술이전 프로그램(NASA Technology Transfer Program)의 위력입니다. 이는 미국 스타트업의 산실이기도 합니다.
미국이 세계 최강대국을 유지하는 이유 중 하나가 달파나 NASA같이 당장 성과를 내기 힘든 장기과제에 막대한 정부 예산이 투입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한국은 이런 국가급 지원이 부족하지만, 집중해서 파고들면 어떻게든 성과를 내는 민족성으로 버티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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