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2일 금요일

우크라이나 전쟁과 푸틴의 종전 제안 배경

 푸틴에게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푸틴은 전쟁을 끝내는 조건으로 우크라이나가 현재 러시아가 점령한 지역에서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푸틴의 종전 이야기가 나오는 배경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2018년 6월, 푸틴은 연금법 개정안을 발표했습니다. 남자는 60세, 여자는 55세부터 받을 수 있었던 국민연금을 남자는 65세, 여자는 63세로 크게 늦춘 것입니다. 연금 수령 시기가 남자는 5년, 여자는 8년 늦어졌지만, 러시아 남자들이 더 화를 냈습니다. 술을 좋아하는 러시아 남자의 평균 수명이 62세인데, 65세부터 연금을 준다는 것은 사실상 연금을 받을 수 없다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인의 90%가 개정안에 반대했고, 모스크바 등 여러 도시에서 "푸틴은 도둑놈"이라는 연금법 개정 반대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80%가 넘던 푸틴의 콘크리트 지지율도 50%까지 급락하게 되었습니다. 푸틴의 지지율 하락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1인 독재로 장기 집권을 하는 푸틴의 힘은 80%가 넘는 러시아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율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024년 3월에 예정된 다섯 번째 대통령 선거도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푸틴이 5선에 성공하더라도 압도적인 지지율이 아니라 50%를 살짝 넘는 지지율이 나온다면, 그의 말년이 불안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러시아 국민들은 연금 개혁에 대한 불만을 외부로 돌리며 결집했습니다. 그 결과, 푸틴은 80%대 지지율을 다시 회복했고, 2024년 3월 대선에서 87%의 득표율로 5선에 성공했습니다. 푸틴은 목표 중 하나인 압도적인 5선을 달성한 것입니다.



미국이나 유럽 입장에서는 현재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지역들이 우크라이나 땅이든 러시아 땅이든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이 지역들이 유럽과 영토가 붙어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럽과 영토가 붙어 있다면, 러시아의 기습 침공 위험이 커지지만, 러시아 점령 지역은 러시아에 붙어 있었습니다. 현재 점령 상태를 유지하고 종전을 해도 유럽 연합(EU)은 큰 불만이 없는 상황입니다.


미국도 얻을 수 있는 실리를 모두 얻었습니다. 존재감이 사라져 가던 나토가 살아나면서 EU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회복되었습니다. 러시아가 점령한 지역의 역사도 우크라이나에 완전히 유리하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의 본진은 현재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예프에 있었습니다. 1240년 몽골군이 러시아에 침입해 키예프는 쑥대밭이 되었고, 러시아는 본진을 동북부로 이전했습니다. 그 동북부가 바로 모스크바입니다. 러시아 사람들이 수도가 있었던 우크라이나를 같은 어머니를 가진 작은 동생 정도로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두 나라의 기원이 모두 키예프이고, 일부가 모스크바로 이동했기 때문에 역사적, 문화적으로 한 몸이라는 시각이 강한 것입니다.



푸틴이 소련을 만든 레닌을 탓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레닌이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와 하나로 통합해도 문제가 없었는데, 자치 정부로 만들어 문제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1928년, 소련은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했습니다. 이 계획에 따라 낙후된 농촌 지역을 변화시키겠다며 우크라이나 농촌을 집단농장으로 바꾸었습니다. 농민들은 집단농장을 새로운 농노제라고 부르며 저항했습니다. 스탈린은 농민들의 저항을 힘으로 눌렀고, 2년 내 90% 이상의 농가를 집단농장으로 전환했습니다.



우크라이나 농민들은 가지고 있는 모든 가축과 식량을 집단농장에 내놓고, 공동 경작을 해서 배급을 받아야 했습니다. 농지와 가축, 식량의 소유권은 국가가 가지고, 집단농장에서 나오는 산출물은 국가가 균등하게 나누는 공산주의 정책이었습니다. 농민들은 농사를 짓지 않는 도시 노동자들까지 먹여 살려야 했고, 열심히 일해도 개인에게 추가로 떨어지는 것은 없었습니다. 스탈린은 봉건적인 농촌을 집단농장을 통해 과학적이고 사회주의 방식으로 진보시키면 생산량이 크게 증가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결과는 반대였습니다.


집단농장으로 바뀌자 곡물 생산은 20% 이상 감소했고, 가축 수도 반으로 줄었습니다. 농민들이 자신 소유가 아닌 공유로 돌아가는 집단농장에서 대충 일했기 때문입니다. 곡물 생산은 감소했지만, 도시 주민과 군대를 먹여 살리고 수출까지 욕심내며 대량 공출을 시행했습니다. 집단농장 전에는 천만 톤 정도 곡물을 시장 가격으로 구입했지만, 1931년에는 2300만 톤을 무상으로 공출했습니다. 1932년, 소련 공산당은 수확량을 9000만 톤으로 예상하고, 2900만 톤을 공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실제 수확량은 6700만 톤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공출량은 크게 차이가 없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지역은 공출 강도가 더 심해 수확의 43%가 공출로 나가자 농민들은 수확한 곡물을 숨기기 시작했습니다.



숨긴 곡물을 찾기 위해 정부 차원의 수색과 심문, 압수가 이어졌지만, 공무원들은 할당량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공무원들이 압수할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다음해 농사를 위해 남겨놓은 종자까지 압수하는 상황이 여러 곳에서 발생했습니다. 하필 이 타이밍에 2년 연속 역대급 대흉년이 오면서 매일 15000명이 굶어죽었고, 최종적으로 우크라이나 5000만 명 인구의 12%가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 농업 지역 주민들이 지금도 러시아에 치를 떠는 배경입니다.


우크라이나 도시 지역은 집단농장에서 나오는 곡물이 배급되며 대규모로 굶어 죽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것이 우크라이나 도시 지역과 농촌 지역이 러시아에 대한 감정이 다른 이유입니다.


2차 대전의 승전국들은 독일을 동독과 서독으로 반으로 나누었고, 소련은 동독을 실질적으로 지배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며 동독과 서독이 통일될 때, 서독과 미국은 동독을 지배하던 소련에게 비밀 약속을 했습니다. 통일된 독일의 국경 동쪽으로는 더 이상 서방 국가들이 영역을 확장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소련은 동독에서 철수했고, 독일은 통일되었습니다.



이 비밀 약속을 하는 시기에 동독에 파견 나가 협상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본 소련 KGB 요원이 있었습니다. 바로 푸틴입니다. 그러나 미국과 독일은 소련과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1999년, 폴란드, 체코, 헝가리가 나토에 가입했고, 2004년에는 불가리아와 리투아니아까지 나토로 넘어갔습니다. 푸틴이 더 이상 미국과 EU의 약속에 속지 않겠다고 분노하는 지점입니다.


수백 년 동안 크림반도는 여름철 기후가 쾌적해서 러시아 황제를 비롯한 귀족들과 공산당 간부들이 즐겨 찾는 소련의 휴양지였습니다. 1954년, 소련의 흐루쇼프는 크림반도를 소련 연방 소속인 우크라이나에게 뜬금없이 넘겼습니다. 당시 흐루쇼프는 스탈린이 죽은 뒤 벌어지고 있는 권력 투쟁에서 우크라이나 공산당의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게 넘겨줬다고 해도, 어차피 소련 안에서 이동한 것이라 큰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별개의 국가로 갈라지자 상황이 복잡해졌습니다. 크림반도에는 세바스토폴이라는 미국과 나토의 해상 무력을 견제하는 군항이 있었습니다. 세바스토폴은 가장 추운 2월에도 평균 온도가 영상 3도 정도라 1년 내내 바다가 얼지 않는 항구 도시였습니다. 겨울에도 바다가 얼지 않아 러시아 흑해 함대가 기항으로 쓰고 있었는데, 갑자기 우크라이나 땅이 돼버린 것입니다.


소련이 붕괴하며, 우크라이나가 분리되는 과정에서 2042년까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임대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러시아 해군이 임대로 계속 사용할 수 있었지만, 러시아 유일의 부동항이 우크라이나 소유라는 점이 러시아의 신경을 건드렸습니다. 당시 우크라이나 정치권은 친유럽파와 친러시아파가 각축을 벌이는 상황이었습니다. 2013년,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친러 정책에 반발하는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EU 가입을 포기하고, 러시아와 우호 협력 조약을 맺은 것이 원인이었고,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시위를 통해 친 러시아 정권을 몰아내고 친서방 정권을 수립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정권은 러시아의 신경을 계속 건드렸습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세바스토폴에 주둔 중이던 흑해 함대의 임대료를 4배까지 인상하겠다고 통보했습니다. 또한 우크라이나어와 공용어로 사용하던 러시아어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동부 지방, 특히 크림반도에는 우크라이나인보다 훨씬 많은 러시아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러시아어 사용을 금지한다는 발표는 우크라이나를 폭넓은 러시아의 일부로 생각하던 푸틴에게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2014년 동계 올림픽이 러시아 소치에서 개최되었습니다. 당시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아주 험악했습니다. 2013년 6월 23일, 미국 국가 안보국(NSA) 소속 분석관 스노든이 NSA와 CIA에서 빼낸 정보를 가지고 홍콩에서 러시아 모스크바로 가는 비행기를 탄 날이었습니다. 2013년 9월로 예정된 오바마와 푸틴의 정상회담은 취소되었고, 각국 정상들이 참석한 소치 동계 올림픽에 미국은 제대로 된 인물을 참석시키지 않는 험악한 분위기였습니다. 러시아는 동계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크림반도에 전투부대를 진입시켰고, 크림반도 주민들에게 러시아 합병 투표를 진행했습니다. 크림반도 주민들은 친 러시아인들이 대부분이라 96%가 러시아와의 합병에 찬성 표를 던졌습니다.


우크라이나는 대기근을 겪었던 농업 지역과 러시아와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산업이 성장한 지역이 합쳐진 나라입니다. 농업 지역은 반 러시아, 친 유럽 성향을 띠고, 산업 지역은 친 러시아 구도를 띠고 있습니다. 두 세력 간 인구 수가 비슷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선거를 하면 친러 정권이 집권하기도 하고, 반러 정권이 집권하기도 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는 주민들 대부분이 러시아어를 쓰는 전통적인 친러 지역입니다. 2014년, 크림반도를 크림 자치 공화국으로 독립한 후 러시아에 편입한 것이 우크라이나 선거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친러 성향으로 집단 투표를 해주던 크림반도 주민들이 러시아로 가버리니, 친 러시아 표가 줄고 반 러시아 표가 자연스럽게 늘어난 것입니다. 1인 1표를 행사하는 민주주의 투표 제도에서 팽팽하던 친러와 반러 진형이 반러 쪽으로 힘이 몰리게 되었습니다.


반러 세력이 인구 수로 우세해진 우크라이나는 2019년 2월에 나토 가입을 헌법에 명시했습니다. 푸틴은 이렇게 된 바에는 크림반도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의 친러 지역을 모두 러시아 땅으로 만들자는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언어 사용 분포를 보면, 가장 남쪽의 크림반도는 주민 대부분이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대표적인 친러 지역입니다. 푸틴은 1차로 크림반도를 러시아로 가져갔고, 다음 단계로 우측의 푸른색이 많은 친러 지역을 공략했습니다. 현재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는 그 지역은 러시아어가 기본 언어인 지역과 거의 일치합니다.



현재 점령 지역을 유지하고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끝낸다면 푸틴의 두 번째 목표가 달성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 목표인 대선도 87% 득표율의 압도적인 결과로 끝났습니다. 푸틴이 "우크라이나 나토 가입을 보류하고, 현 점령지를 유지하는 선에서 종전을 하자"라는 메시지를 서방에 던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푸틴은 목표를 달성한 상태라 현재 상태에서 전쟁을 끝내고 싶어하고, 미국과 EU도 은근히 동조하는 분위기입니다. 핵심 도시 지역을 넘겨줘야 하는 우크라이나만 애가 타는 상황입니다. 천하의 푸틴도 연금 개혁 때문에 고생할 만큼 연금 개혁은 표가 안 되는 일입니다. 한국의 국민연금 개혁도 쉽지 않은 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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