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1일 목요일

과거의 네덜란드 튤립 열풍과 현대 가상화폐 시장의 유사점

이베리아 반도에는 오랜 기간 동안 이슬람교와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5세기에 기독교를 믿는 에스파냐 왕국이 이슬람을 몰아내고 이베리아 반도를 장악하게 됩니다. 이후 1492년 3월 31일, 에스파냐 왕국은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추방령을 내립니다. 유대인들에게 4개월의 시간을 주고,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나라를 떠나라고 명령했던 이 사건을 "알함브라 칙령"이라고 부릅니다.  




당시 에스파냐 왕국의 인구 약 700만 명 중 유대인은 약 50만 명에 달했는데, 이들은 은행가, 상인, 고리대금업자 등 가장 부유한 집단이었습니다. 에스파냐 왕국은 유대인들에게서 빌린 전쟁 비용을 갚고 공훈을 세운 영주와 기사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기 위해 유대인 추방령을 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나라를 떠나는 유대인들은 금, 은, 현금은 가지고 나갈 수 없었고 몰래 가지고 나가다 발각되게 되면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금, 은, 현금을 가지고 나가지 못하게 되자 재산을 보석으로 바꾸어 나라를 떠났습니다. 이는 법의 허점을 잘 활용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 중 일부는 보석을 가지고 벨기에 앤트워프로 이동하였습니다. 당시 보석은 귀족과 왕실의 전유물로 대중적인 장신구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앤트워프로 온 유대인들은 보석을 일반 대중들에게 거래하기 시작했습니다. 보석 자체의 아름다움과 명품 이미지가 부유한 상인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입니다. 


당시 다이아몬드의 최대 생산국은 인도였는데, 유대인들이 다이아몬드를 처음으로 가공하여 판매하면서 부를 쌓아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보석을 뜻하는 "Jewelry"라는 용어가 유대인(Jew)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앤트워프는 전 세계 다이아몬드 거래의 80%가 이루어지는 다이아몬드의 수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베리아반도에 살던 유대인 50만 명 중 절반 정도는 기독교로 개종하여 스페인에 남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스페인을 떠나 포르투갈로 이동했습니다. 그러나 1547년 포르투갈에서도 종교 검열이 시작되자, 유대인들은 다시 최종 정착지인 네덜란드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바다보다 낮은 저지대가 많아 바닷물이 자주 범람하니, 땅이 소금 밭이라 농사가 힘든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네덜란드 원주민들은 대부분 청어를 잡는 어업을 하였는데, 청어는 돈이 되는 고기였습니다. 




유럽 기독교 국가에서는 1년의 1/4 정도가 금식일이었기 때문에 소나 돼지, 닭 같은 고기를 먹을 수 없었지만, 생선은 고기로 간주되지 않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청어를 잡아 소금에 절이면 1년 정도는 냉장을 하지 않아도 먹을 수 있어, 금식일이 있는 유럽에서 청어는 장사가 되었습니다. 


네덜란드로 이주한 유대인들은 청어를 절이는 소금에서 돈 냄새를 맡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떠나온 이베리아반도의 천일염을 독점 수입하여 암염보다 저렴하고 맛있는 청어를 공급함으로써 청어 시장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덴마크의 발트해 통행세를 피하기 위해 갑판이 작고 선창이 큰 특수 선박인 '플루트선'을 개발하여 운송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네덜란드 유대인들은 유럽 화물무역 시장의 절반 이상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네덜란드 유대인들이 큰돈을 벌기 시작하자 기독교 국가들의 견제가 시작되었습니다. 그중 하나로 네덜란드 배의 스페인 항구 입항이 금지되었습니다. 이에 네덜란드 유대인들은 유럽 화물 운송을 포기하고 해외 무역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인도, 중국 등으로 무역을 확대하며 당시 해양 제국이었던 영국과 경쟁을 시작했습니다. 특히 중국에서 이 동인도 회사가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당시 유럽 지역에서는 금과 은의 가치 비율이 12대 1 정도였지만, 은본위제도를 운영하던 중국에서는 이 비율이 6대 1 정도로 더 유리했습니다. 이를 이용해 은을 가득 실은 배를 중국에 보내 금으로 바꿔오면 기본적으로 2배 이상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은을 금으로 바꾸면 부피가 줄어들어 돌아오는 배에 중국산 도자기를 실어 실질적인 부가수익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중국과의 교역에서 큰 이익을 창출한 네덜란드 유대인들은 유럽 무역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네덜란드의 무역 경쟁국 영국은 선교사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중국은 영국과 교역하면 선교사들이 따라들어와 기독교를 퍼트리는 것이 정권 유지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반면 네덜란드 유대인들은 종교와 관련이 없었습니다. 유대교는 유대인들만 믿는 민족 종교라 타민족에 전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국 입장에서는 종교 전파 없이 장사만 하는 네덜란드 유대인들이 훨씬 마음 편한 무역 파트너였습니다. 이에 중국과의 거래 비중을 점점 늘려갔습니다.


한편, 네덜란드 유대인들이 큰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부작용도 나타났습니다. 너무 많은 자금이 시장에 흘러들어 예금이나 부동산 투자만으로는 소화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투자 대상을 찾던 유동자금들이 튤립을 발견하였습니다. 당시 단색의 평범한 튤립은 저렴했지만, 희귀한 종의 튤립은 비싸게 거래되고 있었습니다. 집에 희귀한 튤립을 소유하는 것은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기에, 부유층을 중심으로 희귀종 튤립을 구하려는 수요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중산층과 서민들까지도 부자들의 취미생활인 희귀종 튤립 재배에 올라타기 시작했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주식이 너무 비싸서 구매할 수 없었던 이들은 꿩대신 닭이라는 마인드로 튤립에 투자하게 되었습니다. 수요가 늘어나면서 희귀종 튤립의 가격이 치솟기 시작했고, 네덜란드 전역에 튤립 열풍이 일어났습니다.


튤립은 꽃이 아닌 알뿌리인 구근 형태로 거래되었는데, 구근의 생김새가 비슷해 희귀종인지 일반종인지 구별하기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키워서 꽃을 피워봐야 구근이 일반종인지 큰돈이 되는 희귀종인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일종의 랜덤박스 로또와 같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400여 종의 신품종 튤립이 개발되면서, 튤립들은 황제급, 총독급, 제독급 등으로 등급이 매겨져 거래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637년 1월부터 튤립 가격이 폭등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에도 두세 배씩 오르는 날이 있었고, 한 달 만에 몇십 배까지 오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황제급 튤립 한 뿌리를 팔면 돼지 8마리, 황소 4마리, 양 12마리, 밀 24톤, 와인 630리터, 맥주 600리터, 버터 2톤, 치즈 450킬로그램, 은 술잔, 옷감 108킬로그램, 침대세트 등을 모두 사고도 돈이 남을 정도였습니다.


네덜란드 1위 은행인 암스테르담은행의 예치금이 350만 길드였지만, 암스테르담에서만 2000만 길드 이상의 튤립이 거래되었습니다. 가격이 빠르게 상승하자 많은 사람들이 튤립 재배에 뛰어들면서 공급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637년 2월 5일 아침, 튤립 가격이 지나치게 비싸다는 소문이 돌면서 투자자들의 불안감이 커졌고, 팔려는 사람은 많아지고 사려는 사람은 갑자기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2월 5일부터 4개월 간 튤립 가격은 99%나 폭락하고 말았습니다. 튤립 가격 폭락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난장판이 되었고, 자포자기한 이들이 암스테르담 운하에서 자살하는 사태까지 발생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튤립 가격은 다시는 예전 수준까지 오르지 못했습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새로운 가상화폐들이 등장하면서, 이를 튤립 버블과 연관 지어 생각하게 됩니다.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은 약간의 의미가 있다고 보입니다. 이들은 일종의 국가화폐 대피소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인플레이션이 심각한 국가에서는 달러나 금 대신 비트코인을 구매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현금이나 금괴를 보관하기는 쉽지만, 많은 금액을 거래하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상화폐는 대량의 자금을 쉽게 저장하고 이체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장점들은 정상적인 환경에서는 크게 부각되지 않습니다. 제도권 금융기관을 통해 거래하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대부분의 가상화폐들은 이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단순히 더 비싼 가격에 사주는 사람이 있으면 가격이 오르고, 그렇지 않으면 가격이 떨어지는 수급 시장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이는 튤립 버블과 매우 유사한 양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투기가 아닌 진정한 투자를 위해서는, 가치 상승에 따른 가격 반영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단순히 누군가 더 비싼 가격으로 사주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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